(펌) 군필 수학도가 30대 미혼모 만난 썰
2020.02.24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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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아무에게도 꺼내지 않았던 근 1년간의 내 썰을 풀어보고싶다.
처음 만난날은 작년 8월 중순이었다.
8월초에 11-11군번으로서 전역을했고,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교회에 나가니까 나보다 어린,이제 막 대학에 들어간 아이들이 바글바글했고
친구는 물론이고 그사람들은 나에게 청년회라는 사교모임에 가입하라고 아우성이었다.
나는 종교관도 나름 남달랐으며 한국 종교인집단도 그렇게 썩 마음에 들진 않았고
무엇보다 청년회처럼 시끌벅적한 사교모임을 제일 싫어했던터라 당연히 거절했다.
아마 이런성격이 나를 수학과라는 전공으로 오게한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서울 모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있다. 친구에게는 일요일 예배를 보는것으로
족하다고 말해주었다.그리고 몇주간 나는 머리를 비우는데 적격인 예배를 들으러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로 갔다.
그곳에서 그 여자를 만났다.
지금은 내가 '누나' 혹은 '너' 혹은 '이름'을 부르는 그 여자.
예배시작전, 담임목사와 안부를 주고받았던 내게 봉사활동 가입을 권유했던 그여자.
그 봉사활동은 담임목사도 참가하는 활동이었으며 일요일 오전예배후 2시간동안
교회의 사람들을 상대로 배식 및 음식을 나르는 등의 간단한 작업이었다.
간단한 작업이면서도 큰 인원이 소비되는 활동이기에 사교모임의 성격은 전혀 없었고
다만 끼리끼리 뭉친 그룹내에서의 친목활동은 어느정도 있었다. 하지만 난 그정도는 감내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여자때문이었다.
나는 이목구비가 또렷한게 특징인 사람을 선호한다. 가령 김옥빈이라던지, 그런 이국적이면서도 시원한 외모를
선호한다. 그여자는 내가 원하는 외형을 지녔었다. 당연히 나는 끌릴 수 밖에 없었고
군대를 다녀온뒤 얼마안된 나의 봉사라던지 성숙한 삶따위에대한 호기와 도전까지 나를 그곳으로 내몰았다.
그 활동을 통해 나는 그여자와 친해졌고 서로 통성명도 하게되었고 나이도 알게되었다.
그여자는 30세,나는 20대 초중반의 막 군대를 제대한 남자.
그여자는 고졸출신 대형서점 안내직원, 나는 대학생.
그여자는 자신이 번돈으로 서울에 소형아파트 전세를 얻었고
나는 잘난부모를 얻어서 도곡동에 괜찮은 아파트를 만났다.
그여자는 예쁘고 건강했으며 지혜롭고 참하며 생활력있는 여자였지만
나는 경험없고 가진것 없으며 배움도 탁월하지 못하고 지혜롭지도 못한 놈이었다.
내가 그여자보다 우월한건 부모의 재산과 대입시험의 점수, 그리고 체내 근육량 뿐이었다.
이것이 내가 그 연상의 여자를 동경하게된 이유이다.
우리의 만남은 교회 활동에서 점차 사생활로 번졌고 평일에도 자주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언젠가는 고졸인 그녀를 위해 쉬는날 우리 학교로 대려가 학교 근처의 대학생들의 특권인
대학맛집을 소개시켜주기도 했고, 그녀는 직장인답게 그녀의 직장근처의 식당에서
맛좋은 파스타를 사주기도 했다. 이런 만남은 점점 잦아졌으며 사실상 이 관계가 어떤관계인지
애매해지는 단계까지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아마 첫만남이후 4개월뒤인 12월쯤엔 서로가 서로의 생각을 어느정도 읽고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를 나의 아름다운 이상형에서 동경하는 연상녀를 지나서
완벽한 이상과 정착지,안락의 섬으로 대려가고 있었다.
그것이 정점을 찍은날은 2013년 12월 24일.크리스마스 이브 밤 10시.
우리는 애매한사이답게 애매한 시간 저녁 6시에 만나서 밥을 먹고 영화를 한편보았으며
강남역일대의 유명한 생맥주집에서 맥주를 두어잔 했다.그리고 밤 10시가 되었다.
나는 여성과 보내는 최초의 크리스마스를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ㅅㅅ에대한 생각도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ㅅㄱ가 서로 교통하는것 그 이상의 의미였다.
그것은 안락의 섬이자 종착지에의 도착이었고 점령이었다. 내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쟁취해내는
가히 혁명의목전 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취기가 약간 올라온 나는 2시간뒤면 크리스마스인데
다른곳에 들려서 좀더 있자고 했다.가령 다른 술집이라던지.
그녀는 그렇다면 차라리 케익을 사서 자신의 집에서 축하를 하는것은 어떻겠냐고 했다.
나는 당황했지만 한번 말을 꼬아서 '집이 더러울텐데 가고싶지 않다'등의 말로 의사를 타진했다.
눈치가 있던 그녀답게 '집은 더럽지 않다.굉장히 깔끔하다고 자부한다'고 꼬아서 대답했다.
나는 마지못한척 수긍했고, 다행히 아직까지 운영하는 빵집에 들러서 케익을 샀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그녀의 집이 있는 장지동까지 함께 갔다.
당연히 ㅇㄷ롭게 ㅋㄷ은 사지 못했다.그럴 겨를도 없었다.
그녀의 아파트에 도착.
나는 처음 들어가면서 두번놀랐는데 하나는 고졸도 열심히 일하면 이정도 중산층의 아파트에
살수 있다는것과(비록 전세였지만) 여자혼자 사는것이 꼭 더럽게 사는것을 의미하는 인터넷글이
거짓일 수 있다는것에 놀랐다.그녀는 케익을 식탁위에 올려놓고 날더러 잠깐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했다.
나의 외투를 받아 벽걸이형 옷걸이에 걸고 자신의 코트를 정리하더니 어느방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의 목소리었고 칭얼대는소리가 꼭 유치원생 정도 되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녀는 눈비비며 인사를 하는 내복차림의 어떤 아이를 대리고 나왔고 나에게 소개시켰다.
자신의 4살배기 아들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굉장히 힘든 얼굴로 굉장히 당황해하는 내 얼굴을 보며
말을 꺼냈다. 일단 10분뒤면 크리스마스인데 축하부터 하자 라고.
나는 당황했지만 화낼 권리는 없었다.명백히 우리 관계는 애매한관계였기에 화내는것은 애매하다.
별로 안기쁜 사실 최악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며 겉으로 웃어재꼈다.
그리고 TV를 보며 그들의 이야기에 말없이 수긍했고
케익을 몇점 먹은 그 아이는 나에게 배꼽인사하며 다시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나의 애매한 당황은 그때부터 이해하기위한 노력으로 변모했다.
도대체 무슨일인지, 나를 이해시켜달라.
그 여자는 술은 없다며 차를 내왔고 나에게 사연을 털어놓았다.
남자를 잘못만났다.미혼모가 되었다.나혼자 길렀다. 그 남자와는 완전히 갈라섰다.
꽤 간단했다. 당연히 간단했어야 했다. 아이가 생성되는건 너무 간단하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에대해 때로는 눈물을 글썽이기도하며 이야기 하고
억지스런 차분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의 좀더 깊은 인생에대한 이야기를 질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알수 없는 기운으로 내게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꺼냈다.
나는 그것이 본론이라고 단번에 캐치했다. 나름 눈치가 있었던것 같다.
우리의 애매한 사이가 곧있으면 명백한 사이로 발전할 것이다.그것을 속이고 싶지 않으므로
나는 오늘 초대를 통해 비밀을 공개했다. 나를 좋아하지만 부탁할 자격이 없어서 이렇게 선택권을 준다고.
나는 아까전 배꼽인사가 생각났다. 얼굴엔 미소가 앉았고 얼굴 근육이 마음을 움직였을지도 모르지만
대수롭지 않은듯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선택권을 준 것에대해 감사의 표시를 했다.
어쩌면 감사와 현실을 구분못하는 치기였을수도 있지만 그 감사와 함께 고백을 했다.
우리는 손을 맞잡고 서로를 차분하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나에게 그녀는 아름다운 이상형이었고
동경하는 연상의 여인이었으며 결국 내가 점령한 안락한 종착지이자
내 뿌리내릴 소유지일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 현실이었고 나는 그어떤 점령의 쾌감 혹은 정착의 안도또한 느끼지 못하고
또다시 애매한 ㅅㅇ과 안착아닌 불시착의 편입을 맛보게 되었다.
물론 그 크리스마스의 밤은 꽤 의미있는 밤이었다.
아이가 자고있는 그집에서 나는 그녀의 안방 침대위에서 처음으로 여자를 경험했다.
우리는 서로 분위기에 취해 현실을 잊고자 발악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안락의 섬을 찾기위해 그녀의 몸을 들쑤셨고
그녀는 나에게 그녀만의 어떤 이상을 찾기위해 내몸을 들쑤셨을 것이다.
어떤것이건 우리둘다 현실엔 없는 환상에 취한 머저리였다.
나에겐 그녀의 ㅅㅇ은 고통에 ㅅㅇ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이후로 수개월이 지난 나는 더이상 교회는 나가지 않는다.
학교를 다시 다니게되며 공부에 전념하고 싶어서 선택한 것이지만
현실은 잊을 수 없었다. 그녀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가끔 집에 과제를 핑계삼아
그녀의 집에서 생활하곤 한다. 그 아이와도 꽤 친해졌다.
솔직히 지금 나와 그녀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어쩌면 이 이야기는 목적이 없다.
그냥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처음 만난날은 작년 8월 중순이었다.
8월초에 11-11군번으로서 전역을했고,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교회에 나가니까 나보다 어린,이제 막 대학에 들어간 아이들이 바글바글했고
친구는 물론이고 그사람들은 나에게 청년회라는 사교모임에 가입하라고 아우성이었다.
나는 종교관도 나름 남달랐으며 한국 종교인집단도 그렇게 썩 마음에 들진 않았고
무엇보다 청년회처럼 시끌벅적한 사교모임을 제일 싫어했던터라 당연히 거절했다.
아마 이런성격이 나를 수학과라는 전공으로 오게한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서울 모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있다. 친구에게는 일요일 예배를 보는것으로
족하다고 말해주었다.그리고 몇주간 나는 머리를 비우는데 적격인 예배를 들으러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로 갔다.
그곳에서 그 여자를 만났다.
지금은 내가 '누나' 혹은 '너' 혹은 '이름'을 부르는 그 여자.
예배시작전, 담임목사와 안부를 주고받았던 내게 봉사활동 가입을 권유했던 그여자.
그 봉사활동은 담임목사도 참가하는 활동이었으며 일요일 오전예배후 2시간동안
교회의 사람들을 상대로 배식 및 음식을 나르는 등의 간단한 작업이었다.
간단한 작업이면서도 큰 인원이 소비되는 활동이기에 사교모임의 성격은 전혀 없었고
다만 끼리끼리 뭉친 그룹내에서의 친목활동은 어느정도 있었다. 하지만 난 그정도는 감내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여자때문이었다.
나는 이목구비가 또렷한게 특징인 사람을 선호한다. 가령 김옥빈이라던지, 그런 이국적이면서도 시원한 외모를
선호한다. 그여자는 내가 원하는 외형을 지녔었다. 당연히 나는 끌릴 수 밖에 없었고
군대를 다녀온뒤 얼마안된 나의 봉사라던지 성숙한 삶따위에대한 호기와 도전까지 나를 그곳으로 내몰았다.
그 활동을 통해 나는 그여자와 친해졌고 서로 통성명도 하게되었고 나이도 알게되었다.
그여자는 30세,나는 20대 초중반의 막 군대를 제대한 남자.
그여자는 고졸출신 대형서점 안내직원, 나는 대학생.
그여자는 자신이 번돈으로 서울에 소형아파트 전세를 얻었고
나는 잘난부모를 얻어서 도곡동에 괜찮은 아파트를 만났다.
그여자는 예쁘고 건강했으며 지혜롭고 참하며 생활력있는 여자였지만
나는 경험없고 가진것 없으며 배움도 탁월하지 못하고 지혜롭지도 못한 놈이었다.
내가 그여자보다 우월한건 부모의 재산과 대입시험의 점수, 그리고 체내 근육량 뿐이었다.
이것이 내가 그 연상의 여자를 동경하게된 이유이다.
우리의 만남은 교회 활동에서 점차 사생활로 번졌고 평일에도 자주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언젠가는 고졸인 그녀를 위해 쉬는날 우리 학교로 대려가 학교 근처의 대학생들의 특권인
대학맛집을 소개시켜주기도 했고, 그녀는 직장인답게 그녀의 직장근처의 식당에서
맛좋은 파스타를 사주기도 했다. 이런 만남은 점점 잦아졌으며 사실상 이 관계가 어떤관계인지
애매해지는 단계까지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아마 첫만남이후 4개월뒤인 12월쯤엔 서로가 서로의 생각을 어느정도 읽고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를 나의 아름다운 이상형에서 동경하는 연상녀를 지나서
완벽한 이상과 정착지,안락의 섬으로 대려가고 있었다.
그것이 정점을 찍은날은 2013년 12월 24일.크리스마스 이브 밤 10시.
우리는 애매한사이답게 애매한 시간 저녁 6시에 만나서 밥을 먹고 영화를 한편보았으며
강남역일대의 유명한 생맥주집에서 맥주를 두어잔 했다.그리고 밤 10시가 되었다.
나는 여성과 보내는 최초의 크리스마스를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ㅅㅅ에대한 생각도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ㅅㄱ가 서로 교통하는것 그 이상의 의미였다.
그것은 안락의 섬이자 종착지에의 도착이었고 점령이었다. 내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쟁취해내는
가히 혁명의목전 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취기가 약간 올라온 나는 2시간뒤면 크리스마스인데
다른곳에 들려서 좀더 있자고 했다.가령 다른 술집이라던지.
그녀는 그렇다면 차라리 케익을 사서 자신의 집에서 축하를 하는것은 어떻겠냐고 했다.
나는 당황했지만 한번 말을 꼬아서 '집이 더러울텐데 가고싶지 않다'등의 말로 의사를 타진했다.
눈치가 있던 그녀답게 '집은 더럽지 않다.굉장히 깔끔하다고 자부한다'고 꼬아서 대답했다.
나는 마지못한척 수긍했고, 다행히 아직까지 운영하는 빵집에 들러서 케익을 샀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그녀의 집이 있는 장지동까지 함께 갔다.
당연히 ㅇㄷ롭게 ㅋㄷ은 사지 못했다.그럴 겨를도 없었다.
그녀의 아파트에 도착.
나는 처음 들어가면서 두번놀랐는데 하나는 고졸도 열심히 일하면 이정도 중산층의 아파트에
살수 있다는것과(비록 전세였지만) 여자혼자 사는것이 꼭 더럽게 사는것을 의미하는 인터넷글이
거짓일 수 있다는것에 놀랐다.그녀는 케익을 식탁위에 올려놓고 날더러 잠깐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했다.
나의 외투를 받아 벽걸이형 옷걸이에 걸고 자신의 코트를 정리하더니 어느방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의 목소리었고 칭얼대는소리가 꼭 유치원생 정도 되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녀는 눈비비며 인사를 하는 내복차림의 어떤 아이를 대리고 나왔고 나에게 소개시켰다.
자신의 4살배기 아들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굉장히 힘든 얼굴로 굉장히 당황해하는 내 얼굴을 보며
말을 꺼냈다. 일단 10분뒤면 크리스마스인데 축하부터 하자 라고.
나는 당황했지만 화낼 권리는 없었다.명백히 우리 관계는 애매한관계였기에 화내는것은 애매하다.
별로 안기쁜 사실 최악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며 겉으로 웃어재꼈다.
그리고 TV를 보며 그들의 이야기에 말없이 수긍했고
케익을 몇점 먹은 그 아이는 나에게 배꼽인사하며 다시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나의 애매한 당황은 그때부터 이해하기위한 노력으로 변모했다.
도대체 무슨일인지, 나를 이해시켜달라.
그 여자는 술은 없다며 차를 내왔고 나에게 사연을 털어놓았다.
남자를 잘못만났다.미혼모가 되었다.나혼자 길렀다. 그 남자와는 완전히 갈라섰다.
꽤 간단했다. 당연히 간단했어야 했다. 아이가 생성되는건 너무 간단하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에대해 때로는 눈물을 글썽이기도하며 이야기 하고
억지스런 차분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의 좀더 깊은 인생에대한 이야기를 질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알수 없는 기운으로 내게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꺼냈다.
나는 그것이 본론이라고 단번에 캐치했다. 나름 눈치가 있었던것 같다.
우리의 애매한 사이가 곧있으면 명백한 사이로 발전할 것이다.그것을 속이고 싶지 않으므로
나는 오늘 초대를 통해 비밀을 공개했다. 나를 좋아하지만 부탁할 자격이 없어서 이렇게 선택권을 준다고.
나는 아까전 배꼽인사가 생각났다. 얼굴엔 미소가 앉았고 얼굴 근육이 마음을 움직였을지도 모르지만
대수롭지 않은듯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선택권을 준 것에대해 감사의 표시를 했다.
어쩌면 감사와 현실을 구분못하는 치기였을수도 있지만 그 감사와 함께 고백을 했다.
우리는 손을 맞잡고 서로를 차분하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나에게 그녀는 아름다운 이상형이었고
동경하는 연상의 여인이었으며 결국 내가 점령한 안락한 종착지이자
내 뿌리내릴 소유지일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 현실이었고 나는 그어떤 점령의 쾌감 혹은 정착의 안도또한 느끼지 못하고
또다시 애매한 ㅅㅇ과 안착아닌 불시착의 편입을 맛보게 되었다.
물론 그 크리스마스의 밤은 꽤 의미있는 밤이었다.
아이가 자고있는 그집에서 나는 그녀의 안방 침대위에서 처음으로 여자를 경험했다.
우리는 서로 분위기에 취해 현실을 잊고자 발악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안락의 섬을 찾기위해 그녀의 몸을 들쑤셨고
그녀는 나에게 그녀만의 어떤 이상을 찾기위해 내몸을 들쑤셨을 것이다.
어떤것이건 우리둘다 현실엔 없는 환상에 취한 머저리였다.
나에겐 그녀의 ㅅㅇ은 고통에 ㅅㅇ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이후로 수개월이 지난 나는 더이상 교회는 나가지 않는다.
학교를 다시 다니게되며 공부에 전념하고 싶어서 선택한 것이지만
현실은 잊을 수 없었다. 그녀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가끔 집에 과제를 핑계삼아
그녀의 집에서 생활하곤 한다. 그 아이와도 꽤 친해졌다.
솔직히 지금 나와 그녀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어쩌면 이 이야기는 목적이 없다.
그냥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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